2026년(11호-)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11호를 펴내며
_편집위원장 김구원

어느덧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11호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고대근동학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이번에도 옥고를 제공해주신 집필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이번 호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고대동양학 박사과정생인 사샤 예라닌(Sasha Yeranin) 선생님이 서평 집필진으로 새로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고대근동학 분야의 양서들을 맛있게 소개해주실 예정입니다.


이번 호에는 연재 4편과 서평 3편을 실었습니다. 이번 호를 관통하는 주제를 찾자면 멸망과 전쟁, 그리고 실존적 허무라는 단절의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편되고 이어져온 ‘변형된 연속성’일 것입니다. 수록된 글들은 고대인들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문학적 유산을 재구성했는지, 그리고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 앞에서 어떤 신학적 성찰을 남겼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이런 고대의 기록들은 단순히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격변의 시대를 읽어내는 귀중한 지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윤성덕 선생님은 바빌로니아의 지혜문학인 ⟨쉬마 밀카⟩를 통해, 전통적 가치를 전수하려는 아버지와 인간 실존의 허무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아들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지적 논쟁을 복원해냅니다. 저자는 성실한 노동과 가문의 번영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교훈 모음집의 형식이 아들의 비판적 대답을 기점으로 어떻게 전복되는지를 추적하며, 죽음이라는 필연적 한계 앞에서 지혜의 가치를 묻는 회의주의적 담론의 발흥을 조명합니다. 특히 지하세계의 어둠과 인생의 덧없음을 토로하는 아들의 통렬한 항변은 고대 서아시아의 문학 전통이 ‘단순한 수집’을 넘어 ‘비판적 성찰’의 단계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이 글은 수천 년 전의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도달한 고대의 대화가 현대인의 실존적 고민과도 깊게 맞닿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며, 독자들에게 삶의 유한성 속에서 진정한 지혜가 설 자리를 묻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주원준 선생님의 글은 기원전 12세기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땅에 묻혔던 이드리미 좌상(statue of Idrimi)의 발견과 비문을 통해, 고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이 지녔던 독특한 문학적 전승과 역사적 연속성을 날카롭게 조명합니다. 저자는 이 좌상이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을 넘어, 히타이트와 밋탄 사이의 지정학적 격랑 속에서 약소국 알랄라흐가 선택한 생존의 기록이자, 훗날 이스라엘 성경 내러티브로 이어지는 공통의 선행본문(Vorlage)을 품고 있는 문학적 자양분임을 논증합니다. 특히 조상신의 뺨에 자신의 서명을 새긴 샤루와 서기의 파격적인 행위를 ‘반복적 응시’의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성경 형성 이전 시기의 지적 담론을 주도했던 서기들의 위상과 그들이 남긴 ‘변방 악카드어’ 문학이 지닌 신학적 · 사적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예슬 선생님은 현대 기호학의 틀을 통해 고대근동의 이미지가 지닌 독자적인 위상과 능동적인 ‘행위자(agent)’로서의 힘을 심도 있게 고찰합니다. 저자는 이미지를 단순히 텍스트를 보조하거나 현실을 반영하는 수동적 도구로 보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대상의 유무와 상관없이 현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표상(representation)’이자 존재의 연장으로서 이미지에 주목합니다. 특히 악카드어 ‘짤무(ṣalmu)’의 존재론적 연결성과 샤르 푸히(šar pûḥi) 의례 등을 통해 고대근동인들이 가졌던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인식을 퍼스의 기호학적 양상과 결합해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모호한 경계를 ‘기호’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고대근동의 도상들을 성서 해석의 풍요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학술적 가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삭 선생님의 글은 기원전 6세기 전후 유다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 포로기라는 격변의 시기를 로제트(Rosette), 사자(Lion), 모짜(mwṣh) 인장이라는 물질 자료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기존 학계의 ‘빈 땅(Empty Land)’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행정 체계의 ‘변형된 연속성’을 입증해냅니다. 저자는 왕국 말기 요시야 시대의 중앙집권적 의지를 담은 로제트 인장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빌로니아 제국 질서에 적응한 사자 인장과 모짜 인장 체계로 재편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정치적 중심지가 미스바와 라맛 라헬로 이동하는 지각변동 속에서도 유다의 하부 행정 인프라는 끈질기게 생존했음을 논증합니다. 특히 인장의 도상학적 변화와 지리적 분포를 통해 제국의 수탈과 지역 사회의 생존 전략이 맞물린 행정적 기억을 복원해냄으로써, 문헌 자료의 침묵 뒤에 가려진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역동적인 전환기를 실증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구원 선생님은 메소포타미아 종교사 연구의 기념비적 고전인 토르킬드 야콥슨의 ⟪흑암 속의 보물: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역사(The Treasures of Darkness: A History of Mesopotamian Religion)⟫을 통해, 전쟁과 기근이 문명을 황폐화했던 기원전 1천년기 격동의 시대상을 반영한 종교적 변모를 예리하게 포착해냅니다. 저자는 신성이 잔혹한 폭력의 주체로 변모하고 개별 신들의 인격이 거대 주신으로 통합되는 ‘신학적 절대주의’의 흐름을 조명하는 한편,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인간이 선택한 ‘무위적 경건(quietistic piety)’이라는 역설적인 내적 통찰을 심도 있게 분석합니다. 특히 야콥슨이 제시한 종교적 현상들을 단순한 도덕적 퇴행이 아닌 극한의 혼돈 속에서 실존적 의미를 찾으려 했던 ‘생존의 신학’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제국주의적 통치 담론과 결합해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겪은 우주적 트라우마와 그들이 갈구했던 단일한 구원의 의지를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탁월한 학술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성기문 선생님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전 연구의 표준적 초석을 놓은 앤드루 조지(Andrew R. George)의 문헌학적 집대성과, 이를 고대근동 전역으로 확장해 신의 현존 방식을 현상학적으로 고찰한 마이클 헌들리(Michael B. Hundley)의 최신 논의를 예리하게 비교 분석합니다. 저자는 신전의 ‘의례 명칭’ 속에 응축된 우주론적 위계를 추적하는 조지의 엄밀한 지명 사전적 접근과, 건축 환경이 인간의 감각과 행동에 미치는 ‘구조적 소통’ 및 신상의 활성화 과정을 탐구하는 헌들리의 다학제적 방법론을 입체적으로 대조합니다. 특히 고대근동의 신전이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신과 인간이 조우하는 역동적인 ‘거처’이자 신의 유동적 현현이 이루어지는 통로였음을 강조함으로써, 본고는 고대 종교 시설을 단순한 ‘우상 숭배’ 공간이 아닌 고도의 상징 체계와 행동 암시가 작동하는 지적 · 영적 중심지로 재정의하는 데 결정적인 학술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라닌 선생님은 아시리아학의 기념비적 저작인 ⟪메소포타미아: 고바빌로니아 시대(Mesopotamien: die altbabylonische Zeit)⟫에 대한 깊이 있는 서평을 통해, 기원전 20-16세기 아모리 시대의 정치 · 문학 · 사회를 아우르는 방대한 연구 성과와 그 이면에 남겨진 학술적 과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저자는 쐐기문자 문헌이 지닌 독보적인 분량과 다양성을 강조하며, 샤르팽, 에드자르트, 스톨 등 당대 최고의 권위자들이 구축한 ‘백과사전적 지식의 체계’가 어떻게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입체적인 복원을 가능케 했는지 조명합니다. 특히 서구 중심의 연구사에서 간과되기 쉬운 러시아 학계의 관점을 환기하고, 쏟아지는 토판 자료의 ‘급류’ 속에서 ARCHIBAB이나 eBL과 같은 최신 디지털 데이터베이스가 지닌 혁신적 가치를 논함으로써, 본고는 단순한 리뷰를 넘어 고대근동학이 나아가야 할 미래적 지평과 데이터 활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뜻깊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차례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11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김구원 · 3


[ 특별 연재 ]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⑪: 쉬마 밀카, 내 말을 들어라 ③ — 윤성덕 · 9

▪ 고대 시리아-팔레스티나 문학 열전 ①: 이드리미 좌상 ① — 주원준 · 21

▪ 고대 남부 레반트 유다 왕국/예후드 속주의 행정 체계 사례 ④: 유다 왕국 멸망 전후로 등장하는 로제트, 사자, 모짜 인장 — 이삭 · 42

▪ 고대근동 도상학 ②: 고대근동의 이미지와 기호학 — 김예슬 · 75


[ 고대근동학 리뷰 ]


▪ 제1천년기 메소포타미아 종교 분석을 중심으로: 토르킬드 야콥슨, ⟪흑암 속의 보물⟫ ② — 김구원 · 88

▪ 고대근동 신전의 역할과 기능을 탐구한 두 권의 저서: 앤드루 조지, ⟪가장 높은 집: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들⟫ & 마이클 헌들리, ⟪거처에 있는 신들: 고대근동의 신전들과 신들의 현존⟫ — 성기문 · 100

▪ 고바빌로니아 시대 연구를 통해 보는 현 아시리아학의 성과와 도전들: 도미니크 샤르팽 · 디츠 에드자르트 · 마르텐 스톨, ⟪메소포타미아: 고바빌로니아 시대⟫ — 사샤 예라닌 · 114


학회 신간 안내 · 125

학회 가입 안내 ·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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