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8-10호)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9호를 펴내며
_편집위원장 김구원
“삼천 년의 역사를 되짚어볼 줄 모른다면, 그는 그저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괴테의 이 말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다. 인류가 축적해온 기억과 사유를 성실히 탐문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지적인 태도임을 일깨운다.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9호에 실린 여섯 편의 글은 바로 그런 태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 글들은 신화, 지혜문학, 건축, 법률, 물질문화, 제의 언어 등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도 모두 고대 사회의 구조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 세계관과 인간 인식, 지혜문학 속 윤리와 회의, 이집트 왕묘의 공간 정치, 함무라비 법전의 정의 개념, 유다 왕국의 행정 기술, 그리고 히브리어 제의 용어의 다의적 층위에 이르기까지, 각 논문은 치밀한 자료 분석과 이론적 성찰을 통해 고대근동이라는 문명의 층위를 정밀하게 해명한다. 과거를 다루되, 그 해석의 언어는 오늘의 질문과 연결되어 있어, 고대의 흔적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의 자원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이번 호를 묶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연구와 성실한 글쓰기를 통해 수준 높은 논문을 기고해주신 필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원고의 흐름을 세심하게 정리하고 오탈자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며 편집에 헌신해주신 김지혜 선생님의 노고에도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고대의 언어와 텍스트, 유물 속에 깃든 사유를 함께 읽고자 하는 이 소박한 시도에 귀 기울여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이 독자들의 사유와 연구에 작은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호에서 주원준 박사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아트라하시스 이야기〉의 홍수 서사를 바탕으로, 신들의 결정에 의해 일어난 홍수가 전면적이고 파괴적인 전멸로 묘사됨을 분석한다. 특히 신들의 어머니 닌투는 인간의 멸망과 신들의 고통을 가장 깊이 체감하며, 그녀의 탄식과 애가는 신화 속 중심 정서를 이끈다. 닌투는 신들의 굶주림과 목마름, 관계 단절의 비참함을 직접 고백하고, 최고신 아누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인간과 신 사이의 균열을 조명한다.
이 신화는 인간이 신의 필요에 따라 창조되었고, 인간이 사라짐으로써 신들도 고통받는다는 점에서 신과 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야기 전반은 인간의 고통보다 신들의 고통을 더 깊이 묘사하며, 인간이 아닌 신 중심의 ‘신본주의적’ 관점을 드러낸다. 이는 같은 홍수 이야기를 다루는 구약의 노아 서사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으로, 필자는 이 차이가 두 신화의 본질적 성격을 구분하는 핵심이라고 본다. 신들의 고통과 인간의 운명이 겹쳐지는 이 신화는 오늘날에도 책임 없는 권력과 그로 인한 고통이 반복됨을 되새기게 한다.
윤성덕 박사는 이번 호에서 고대 바빌론의 지혜문학인 〈쉬마 밀카〉(또는 〈슈페-아멜리의 교훈〉)를 번역하고 해설했다. 이 작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훈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다양한 속담과 조언을 담고 있다. 아버지 슈페-아멜리는 인생의 여러 측면—여행, 사업, 결혼, 인간관계, 종교적 삶 등—에 걸쳐 장문의 교훈을 전하는데, 내용은 특정 계층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 지혜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한 아들의 응답은 짧고 회의적이며,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면서 아버지의 전통적 조언에 반기를 든다. 작품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며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이 작품은 메소포타미아 본토가 아닌 주변 지역(우가릿, 에마르, 핱투샤)에서만 발견되었으나, 고바빌로니아 시대에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조언은 고대 사회의 윤리, 법, 삶의 방식 등을 다루며 교훈을 제공하지만, 아들의 반론과 회의적 태도는 이러한 지혜문학 전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어, 이 문헌이 단순한 도덕 교육서가 아닌 사유의 장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세대 간의 대화와 충돌은 고대에도 여전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유성환 박사는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제11-12왕조) 왕묘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왕권 회복과 건축 전통의 계승 및 재구성을 분석했다. 몬투호텝 2세는 테베 서안에 독창적인 장례 단지를 조성하며 고왕국 시대의 태양신전 및 피라미드 전통과 테베 고유의 사프 분묘 양식을 결합했다. 제12왕조로 들어서면서 아멘엠하트 1세와 센와세레트 1세는 피라미드 건축을 부활시키되, 진흙벽돌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 방식과 테베 지역 전통을 일부 수용해 중왕국 시대만의 독자적 양식을 정립했다. 이들은 기존 왕묘 양식의 요소들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수도 엘-리시트를 중심으로 왕권의 안정과 정통성을 표현하려 했다.
중왕국 후반 센와세레트 3세와 아멘엠하트 3세는 다슈르와 하와라 등지에 왕묘를 조성하며 고왕국 및 초기 왕조의 전통을 재해석하고 오시리스 신앙과 연결된 장례 관습을 반영했다. 특히 하와라의 대규모 피라미드 단지와 그 속의 ‘미궁’은 고대 저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대표적 사례로, 종교적 의례와 통치 이념을 동시에 구현하는 공간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은 고대 전통과 새로운 건축 기법을 조화롭게 융합하며 피라미드 건축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이후 피라미드는 급속히 쇠퇴하며 중왕국 말기 이후에는 사실상 종언을 맞게 된다. 왕묘의 변화는 단지 건축 양식의 진화가 아니라 권력과 정당성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고민의 산물이었다. 지금도 권위는 여전히 공간을 통해 말한다.
김구원 박사는 함무라비 법전이 단순한 고대 법 규정의 집합이 아니라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룬 학술서이자 교육서라는 장 보테로의 해석을 소개하며, 이를 메소포타미아의 과학적 학문 전통 속에서 이해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의학 문헌처럼 함무라비 법전 역시 조건문 형식(‘만약 ~라면 ~일 것이다’)을 통해 경험적 사례를 추상화하고 규칙화한 문서이며, 이는 단순한 사례 나열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판단 훈련을 위한 지적 체계의 일환이었다. 법전의 구성 방식은 의학 문헌의 신체 배열처럼 주제 간 유기적 흐름을 따르며, 다양한 계층과 상황을 고려하는 변주 기법과 예외 사례까지 포괄하려는 보편성 추구는 과학적 사고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은 실제 재판을 위한 법문이라기보다는 정의 개념을 사례를 통해 체화시키는 ‘정의학 교과서’로 해석된다.
법전 조항들은 다양한 사례 속에서 정의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훈련 자료로 기능하며,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를 반복 학습함으로써 판단력을 키우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길렀다. 따라서 법전을 학습하는 과정은 단순한 규정 암기에 그치지 않고 정의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법학의 본질이자 함무라비가 이 법전을 세운 진정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이 고대 문서는 실용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함무라비 법전은 규범의 집합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학습의 장이었다. 지금 우리의 법과 정의 교육도 단순한 조항 암기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삭 박사는 고대 유다 왕국의 행정과 경제 체계를 반영하는 lmlk 인장 항아리와 그 이전의 pre-lmlk 항아리에 대한 고고학적 논쟁을 다룬다. 먼저 기원전 10세기 말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발견된 손가락 인장 항아리가 lmlk 항아리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지를 검토하며, 형태와 제작 방식, 출토 지역 등에서 일부 유사성이 있으나 문자 인장의 부재와 사용 맥락의 차이로 인해 직접적 연관성은 유보된다고 본다. 이후 학자들은 항아리의 손잡이 형태보다 항아리 전체의 형상에 주목해 ‘pre(전)-lmlk 항아리’라는 개념을 제안했고, 이 항아리들이 9세기 중반부터 유다 지역뿐 아니라 셰펠라 전역에서 출토된다는 점에서 행정용보다는 광범위한 저장 및 유통 용기였음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삭 박사는 3D 스캔 기반의 정밀 분석을 통해 저장 항아리의 형태 변화를 네 시기로 구분하고, lmlk 인장이 찍힌 항아리의 출현 및 지리적 분포가 유다 왕국의 행정 체계 표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힌다. 특히 라기스를 중심으로 한 항아리 분포는 정치 · 행정의 중심지와 주변부 간의 권력 차이를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되며, 인장이 찍힌 손잡이 하나가 국가의 질서와 통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증표였음을 시사한다. 고대의 토기 조각이 단순한 유물이 아닌, 권력과 행정의 흔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도장이 찍힌 문서 한 장의 무게’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성기문 박사는 제이 스클라의 저서 《죄, 부정, 제사 그리고 어톤먼트(Sin, Impurity, Sacrifice, and Atonement)》를 리뷰하며, 히브리어 ‘킾페르(כִּפֵּר)’와 ‘코페르(כֹּפֶר)’의 제의적 의미를 다층적으로 분석한 스클라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정리한다. 스클라는 이 두 용어를 단순히 ‘속죄’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상황과 문맥에 따라 ‘정화’, ‘용서’, ‘속전’ 등의 다양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킾페르가 사람이나 성물을 직접 목적어로 취할 경우 각각 ‘용서’와 ‘정화’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네 부분에 걸쳐 히브리 성경 내 제의 문헌들을 분석하고, 킾페르의 역할이 단일하지 않고 정화와 대속, 봉헌, 성별까지 복합적 기능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성기문 박사는 스클라의 이런 접근이 기존 학설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모든 문맥에서 킾페르가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스클라의 연구는 히브리어 제의 언어에 대한 ‘문맥 기반 해석’이라는 신중한 방법론을 견지하면서도, 단어의 다의성과 통시적 확장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학문적 균형을 보여준다. 그의 시도는 킾페르를 단순한 ‘속죄’ 개념에서 벗어나 정화와 보상, 제의적 순환의 한 요소로 재구성하려는 신학적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하지만 이 다중적 의미 부여는 자칫 해석의 자의성을 높일 수 있으며, 번역과 현대 적용에서 오히려 혼란을 유발할 수 있음을 성기문 박사는 경계한다. 결국 킾페르를 둘러싼 논쟁은 단어 하나가 가진 신학적 무게가 얼마나 깊은지를 상기시키며, 이는 현대 독자들에게도 ‘말의 정확성’이 신앙과 해석 모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묻는 학술적 성찰의 장이 된다.◼
차례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9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김구원 · 3
[ 특별 연재 ]
▪ 함무라비 법전 이야기 ②: 함무라비 법전은 당대의 ‘정의학 교과서’였다 — 김구원 · 11
▪ 고대 이집트의 예술 ⑧: 중왕국 시대 왕묘의 변천 — 유성환 · 23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⑨: 쉬마 밀카, 내 말을 들어라 — 윤성덕 · 44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⑨ — 주원준 · 61
▪ 고대 남부 레반트 유다 왕국/예후드 속주의 행정 체계 사례 ②: 저장 항아리 인장들의 발전사 ② — 이삭 · 78
[ 고대근동학 리뷰 ]
▪ 히브리어 킾페르의 이중적 의미 : 제이 스클라, 《죄, 부정, 제사 그리고 어톤먼트》 서평 — 성기문 · 92
학회 신간 안내 · 100
학회 가입 안내 · 102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8호를 펴내며
_편집위원장 김구원
한국 고대근동학의 저변 확대와 진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자 발간되는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8호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 뵙게 되었다. 이번 호에서도 고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문명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총 6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특히 이삭 박사께서 고대 이스라엘 인장을 주제로 새롭게 연재에 참여해주셔서, 그에 대한 깊이 있고 흥미로운 논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제임스 그린버그의 책 ⟪레위기 어톤먼트의 새 조망: 키페르의 의미와 목적 재고⟫에 대한 서평을 기고해주신 성기문 박사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호에 실린 각 글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구원 박사는 함무라비 법전이 단순한 성문 실정법이 아니라 왕의 판결을 정리한 사례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함무라비 법전이 실제 법정에서 법문으로 인용되지 않았고, 함무라비 법전 내에 포괄성이 부족하며, 특정 사례들을 조금 추상화해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왕의 통치 원칙과 정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아울러 왕권을 정당화하고 후대에 본보기를 제공하기 위한 문서로 제작되었다. 이런 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은 단순한 법률집이 아니라 왕의 통치 철학을 담은 기념비적 성격이 강함을 논의하고 있다.
유성환 박사는 기존의 연재를 잠시 멈추고 특별 기고를 보내왔다.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을 다루는 이 글은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켄아텐(아멘호텝 4세)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로서, 고대 이집트에서 전례 없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는 전통적인 다신교적 신앙을 버리고 태양원반 아텐(Aten)을 유일한 최고 신으로 숭배하는 아텐 신앙(Atenism)을 도입했다.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그는 수도를 기존의 테베에서 아케트아텐(Akhetaten)(현대의 아마르나)으로 이전하고, 예술과 건축 양식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며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전통과 단절했다. 그러나 아켄아텐이 사망한 후 그의 종교개혁은 급격히 폐기되었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체제가 즉시 복원되었다. 기존 신들의 신전이 재개방되고 사제들이 다시 권력을 되찾았으며, 아켄아텐이 건립한 아텐 신앙 관련 기념물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왕의 연대기에서 삭제되었으며, 후대 통치자들은 그의 개혁을 완전히 무시하려 했다.
유성환 박사에 따르면, 아켄아텐의 개혁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분석과 평가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텐 숭배를 인류 최초의 일신교적 신앙 사례로 간주하며, 그를 유일신 개념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반면 그의 개혁을 종교적 신념이 아닌 정치적 동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강력한 아문(Amun) 신관단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중앙집권화하려 했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또한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은 현대 사상가들에게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켄아텐의 일신교적 개념이 모세(Moses)와 유대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모세가 아텐 신앙을 이집트에서 히브리 전통으로 옮긴 사제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윤성덕 박사는 지혜 문헌 연재를 계속한다. 이번 호에는 논쟁 문학과 지혜문학의 요소를 갖춘 ⟨니싸바와 밀⟩이라는 ‘바빌리’(=바빌론)의 작품을 분석한다. 니싸바는 원래 글쓰기와 풍요의 여신이었지만 후대에는 곡식의 여신으로 남게 되었으며, 본문에서는 밀과 논쟁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구조는 찬양과 기도로 시작하여, 밀이 니싸바에게 풍요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불평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신들의 개입과 세계의 질서가 다시 정립되는 과정이 묘사되며, 마지막은 니싸바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된다. 본문에서 다양한 하위 신들의 역할이 강조되며, 기도와 불평을 통해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특히 윤성덕 박사는 이 작품에 포함된 신적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개념들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이라는 여성적 존재, 신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광채’,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가진 신 개념, 그리고 니싸바를 ‘한 분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표현들이 주목된다. 또한 니싸바 여신의 신격이 확대되면서 천체의 빛과 점성술, 폭풍우까지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내용은 바빌론 문학이 단순한 신화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신의 권능과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신학적 ·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원준 박사도 지난 호에 이어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를 분석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세 번째 토판인 홍수 이야기를 번역하고 해설한다. 엔키로부터 예지몽을 받은 아트라하시스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한다. 꿈을 통해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은 고대근동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벽(갈대벽)이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방주의 건조 명령과 설계가 제시되는데, 방주는 기존의 상식과 달리 정사각형 혹은 원형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방주의 의미는 단순한 탈출 수단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를 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선택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다.
이후 본문에서는 아트라하시스가 방주를 짓고 다양한 동물을 실으며,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계층을 초월한 연대 작업이 이루어진 점이 강조된다. 본격적인 홍수의 징조가 나타났을 때 방주의 문을 닫는 행위가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구별되는데, 이를 통해 방주에 함께 타지는 않았지만 건설을 도운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주원준 박사는 기존의 길가메시 서사나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와 비교해 신과 인간의 관계, 홍수의 의미, 방주의 형태에 관한 다양한 통찰을 제공하며, 홍수 신화가 단순한 재앙 서사가 아니라 고대 종교와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헌임을 보여준다.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이삭 박사는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항아리 인장들을 다룬다. 고대의 저장 항아리는 기름, 와인, 곡물 등을 보관하고 운반하는 필수적인 용기로, 유다 왕국에서는 이러한 항아리 손잡이에 인장을 찍어 경제적 · 행정적 체계를 운영했다. 이 연구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인장들—엄지손가락 인장, 라멜렉(lmlk) 인장, 동심원 인장, 로제트(rosette) 인장, 모짜(mwṣh) 인장, 사자(lion) 인장, 예후드(yhwd) 인장, 예루살렘(yršlm) 인장—의 특징과 변화를 추적한다. 초기에는 단순한 상징이 사용되었지만 점차 왕실 소유 표시와 도시명을 포함하는 등 정교한 행정 도구로 발전했다. 이러한 인장들은 신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등의 지배하에서 변화하며, 유다 지역의 정치적 ·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연구는 문헌 기록이 부족한 시대의 유다 왕국 및 예후드 속주의 경제 · 행정 체계 및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성기문 박사는 제임스 그린버그의 저서를 비평적으로 소개한다. 성기문 박사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키페르(kipper)는 전통적으로 ‘유화하다(propitiate)’ 또는 ‘속죄하다(expiate)’로 번역돼왔으며, 이후에는 ‘정화하다(purify)’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면서 학계에서 논쟁이 지속되었다. 그린버그는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오염과 정화’, ‘혼합’ 그리고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특히 제이콥 밀그롬(Jacob Milgrom)의 오염 및 정화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성소가 죄로 인해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요소라고 보며, 키페르는 성소의 정화가 아닌 관계 회복의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성기문 박사는 그린버그의 연구가 현대 키페르 해석에 대한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차례
▪ ⟪한국고대근동학 노트⟫ 제8호를 펴내며 — 편집위원장 김구원 · 3
[ 특별 연재 ]
▪ 함무라비 법전 이야기 ①: 함무라비 법전은 실정법이 아니었다 — 김구원 · 9
▪ 아켄아텐의 ‘종교개혁’과 그 여파 — 유성환 · 25
▪ 바빌리 사람들의 지혜 ⑧: 니싸바와 밀 — 윤성덕 · 62
▪ 아트라하시스 이야기 ⑧ — 주원준 · 79
▪ 고대 남부 레반트 유다 왕국/예후드 속주의 행정 체계 사례: 저장 항아리 인장들의 발전사 ① — 이삭 · 99
[ 고대근동학 리뷰 ]
▪ 제의적 키페르 동사 의미 연구의 대전환 — 성기문 · 111
제임스 그린버그, ⟪레위기 어톤먼트의 새 조망: 키페르의 의미와 목적 재고⟫ 서평
학회 신간 안내 · 119
학회 가입 안내 · 120